내가 만난 세상

워라밸? 나는 일 중독증에 걸려서 살았네

답설재 2025. 4. 30. 08:29

일에 빠져 살았던 광화문, 그 건물도 저기 보이네(사진 출처 7qgDNnTQw67_20250218124402).

 

 

 

"워라밸, 워라밸" 하더니 요즘은 그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새로 나오는 말들은 유행을 타는 것 같고, 그 단어가 다 아는 상식이 되면 가치가 상실되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쓰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게 좋다. 뒤늦게 그런 용어를 즐겨 쓰는 사람을 만나면 웬지 좀 한심해 보이고 '꼰대' '고집불통' 같은 용어가 떠오르면서 심지어 그를 기피하고 싶어진다.

 

‘워라밸’이란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를 줄여서 일과 개인적 삶 사이의 균형을 이르는 말이란다.

 

말이 그렇지 80대 이상이라면 "나도 워라밸에 맞추어 살았네" 할 수 있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는 척하면서 그 단어를 좀 써볼까 싶어도 조심스러워서 그만두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시기가 지나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불쑥 나타나 "당신이 워라밸이란 말을 쓸 자격이 있나?" 하고 정면으로 대어들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일에 미쳐서 살았다. 봉급 때문에 일한다는 '수치스러운' 소리를 들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직업은 국가사회를 위한 봉사와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일 때 이상적이라는 글을 보게 되면 '이것 봐, 여기도 국가사회가 먼저 나오잖아!' 생각했고, 그런 내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공무원에게는 휴무가 있을 수 없다. 밤에도, 혹 외국에 가 있더라도, 몸이 직장에 있지 않더라도 쉬는 건 아니다. 천재지변이 나면 얼른 피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런 말을 일상적으로 들으며 지낸 것 같다.

그럴 때 피식피식 웃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저렇게 한심해서야......' 하고 그 '월급도둑'을 멸시했다.

 

퇴임을 하고 나니까 세상이 변했다. 워라밸이란 말이 나왔다.

일과 생활의 균형? 이건 '국가사회를 위한 봉사와 개인의 자아실현'의 의미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내가 보기엔 다르다.

'국가사회를 위한 봉사와 개인의 자아실현'이란 일, 직장, 직업과 같은 의미가 강조된다면, 워라밸은 개인의 삶, 삶의 향유 같은 의미가 강조되는 느낌이다.

이 느낌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나는 그 지적을 수용할 의사가 없다.

 

워라밸이 못마땅한가?

천만에!

그건 진실이다. 이의 없다.

이제 워라밸의 개념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말을 한다면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덧붙이고 싶은 건 있다.

나는 일 다하고 마쳤는데, 자아실현보다는 '국가사회 봉사'를 앞세우며 밤낮을 잊은 채 세월을 보내고 집으로 왔는데, 이제 워라밸 세상이 되니까 나를 힐끗거리며 '워라밸도 몰랐던 놈'이라는 식이다.

그것만은 억울하다.

굳이 억울하다고 말해 본 적은 없다.

말까지 해버리면 더 억울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다.

그때 나에게 그런 개념을 강조한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남아 있어도 입을 닫았다.

나는 죄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변명을 하고 싶어도 참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