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

손택수 「차경」

답설재 2015. 9. 22. 11:56

차경

 

 

손택수

 

 

한옥에서는 풍경도 빌려 쓰는 거라네요 차경借景, 창을 내고 문을 내서 풍경을 들이는 일이 빚이라고,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고

 

직업이 마땅찮아 어떨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면 저도 풍경 대출을 받고 싶어요 집 살 때 빚지는 것도 누가 재산이라고 그랬지요 빚 갚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어느새 제 집을 갖게 된다고

 

풍경 좋은 곳은 다 부자들 차지라지만 아무리 좋은 액자인들 뭐하겠어요 청맹과니처럼 닫혀만 있다면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지기 힘든 게 풍경 빚인 줄도 모르겠어요 가난하고 외로워할 줄 아는 사람에겐 창가에 스치는 새 한 마리도 다 귀한 풍경이니까요

 

갚는다는 건 되돌려준다는 거겠지요 빌린 나도 풍경으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도무지 뭘 빌려주었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앉아 있는 저 돌처럼, 저도 빌려 갈 만한 풍경이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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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 『호랑이 발자국』『목련전차』『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편지들이 빛난다』. <신동엽창작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수문학상> 수상.

 

 

 

 

 

 

 

 

집을 나올 때나 들어갈 때 우리 마을 이곳저곳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저 자연을 다 망치는가 싶어서 감시하는 사람처럼 바라보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냥 바라보기만 합니다. 저 건너편 산쪽을 바라볼 때는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전깃줄 같은 건 없다고 치고 산자락만 바라봅니다. 때로는 아파트도 없다고 치고 바라보고, 산의 모습만 오려서 액자에 담듯 바라보기도 합니다.

'저기 산이 그대로 있구나.' 마음을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