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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이야기562

아모스 오즈 장편소설 《유다》 아모스 오즈 AMOS OZ 장편소설 《유다 JUDAS》 최창모 옮김, 현대문학 2021 때로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부엌에서 살금살금 복도로 나가서 그녀의 방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몇 분 동안 집중하노라면 윙윙거리는 것 같은 소리나 나지막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 단조롭고 규칙적으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닫힌 문 너머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 방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지 상상 속에서 그려 보려고 했는데, 몇 번이고 복도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그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어도, 한 번도 거기에 초대받은 적이 없었고 슬쩍이라도 그 안을 (...) (86) 길을 걸으면 몸보다 머리가 앞서 나가는 어설픈 사내 슈무엘 아쉬는 연인 야르데나를 따분한 수문학자 .. 2022. 9. 21.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연인이었다고 해서 좀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엄청난 작가였다. 노인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고 그 문제는 단지 지배 계급들 내부에서만 제기되며(게다가 남자들), 19세기까지 '늙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노인들이 많지도 않았다.(121) 노년은 비참한 것이다. 노년에 대해 위안을 받기보다는 낙심을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라고나 할까?(152~153)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50세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나이에 달해야만 '프레노시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노시스란 정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신중한 지혜로, 체험되는 것이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 2022. 9. 15.
안느 델베 《까미유 끌로델》 안느 델베 지음 《까미유 끌로델》 김명호 옮김, 정음사 1989(12판) 로댕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동안에는 하고 싶은 말이 흘러넘쳤는데 마주 앉았다고 생각하니까 몇 마디만 남은 느낌입니다. 오래 전 광화문의 한 갤러리에서 까미유의 작품을 보았는데 거기 귀하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듯합니다. '이것이구나, 이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했을 것입니다. '지옥문'은 S그룹 건물에서 봤지요. 내내 잊히지 않은 작품은 귀하의 작품이 아니고 까미유의 '어린 소녀 샤틀렌느'입니다. 섭섭한가요? 나는 그 소녀의 표정과 눈빛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연히 떠오릅니다. 조각이 위대한 예술이라는 걸 그 작품을 보며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이 결코 귀하의 작품보.. 2022. 9. 14.
유다의 그리움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소설 《유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하다고 확신한 유다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 예수를 부추겨 예루살렘에 이르게 했지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그만 그 곁을 떠나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직전입니다(405~406). 이 장면을 읽으며 모처럼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리움에 대해 소홀했습니다. 나는 얼굴이 곰보인 임신한 여종이 내 앞에 가져다준 고기 접시를 개 먹이로 식탁 밑에 내려놓았다. 포도주는 식탁 위에 그대로 남겨 놓았다. 난 일어서서 주머니에서 우리의 돈 꾸러미를 꺼냈고 일견 거칠다 싶은 동작으로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고 그 젊은 여인의 품에 던져 주었다. 그렇게 .. 2022. 9. 13.
조영수 동시집 《마술》 조영수 동시집 《마술》 그림 신문희, 청색종이 2018 책 중에서도 동시집을 읽는 저녁이 제일 좋았습니다. 그 시간이 선물 같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누구나 그렇다고, 선물 같다고 할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복잡하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 동시집을 읽고 있으면 그 시간 아이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영수 동시집 《마술》을 읽으며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즐겁다 재미있다 밝다 맑다 가볍다 우울하지 않다 세상은 괜찮다 ..................... 이런 것들이 이 동시집을 읽는 동안의 느낌이었습니다. 아, 시라고 해서 굳이 무슨 운율 같은 걸 넣으려고 애쓰지 않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억지가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더욱더 .. 2022. 9. 7.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붓다가 아직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이다. 부왕에 의해 화려한 궁궐 속에 갇혀 살던 그는 몇 번이나 거기서 빠져나와 마차를 타고 궁궐 부근을 산책하곤 했다. 첫 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그는 어떤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왕자가 깜짝 놀라자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 되노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외쳤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 2022. 9. 3.
에드워드 윌슨 《지구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 《지구의 정복자》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3 신화가 인류의 기원과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는 세계관과 그렇지 않다는 세계관을 서로 화해시킬 수 있을까? 솔직하게, 그리고 짧게 대답하자면, 아니다. 둘은 화해시킬 수 없다. 둘의 대립은 과학과 종교, 경험주의적 태도와 초자연적 존재를 믿는 태도의 차이를 정의한다.(17) 이것이 전제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 수준으로 밀어붙인 것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늘어난 장기 기억, 특히 꺼내어 작업 기억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장기 기억과 단기간에 시나리오를 짜고 전략을 세우는 능력이 아프리카를 탈출하기 직전과 이후에 유럽을 비롯한 각지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에 동의한다. 복잡한 문화의 문턱까지 밀고 간.. 2022. 7. 14.
왜 책읽기에 미쳐 지냈나? 지금은 들어앉아 있지만 최근까지 나는 '삼식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몇 시간짜리 나들이를 하게 되면 기차표 구입 다음에는 꼭 가지고 갈 책을 골랐습니다. 시내에 나갈 때도 매번 책을 갖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인가를 판단했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책을 읽는 걸 아내가 '승인'해 주는지 아닌지를 늘 느낌으로 판단하며 지냈고(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주고 있지만), 혼자 앉아 있는 자유시간 중 얼마만큼을 독서시간으로 할애할 수 있는지부터 계산하곤 했습니다.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 일할 때에도 그게 단 5분, 10분이어도 늘 '지금 이 시간은 책을 좀 읽어도 되는가?'를 염두에 두며 살았고, 최근에는 세상을 떠날 때에도 '나는 일생 동안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하여 읽었나?'를 계산하며 .. 2022. 6. 29.
셰릴 스트레이드 《wild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wild 와일드》 우진하 옮김, 나무의철학 2012 허풍쟁이에 유아독존적인 어느 위인이 영화 "와일드"를 보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한 걸 읽고 '당신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단 말이지? 도대체 어떤 얘기야?' 하고 사 둔 책을 8년 만에 읽었다. 이 책만 보면 그 사람이 떠오르는데다가 부피도 550페이지가 넘어서 얼른 펼쳐지지가 않았는데 '이러다가 결국 못 읽는 것 아닐까?' 싶었다. 내가 그 허풍쟁이의 허풍 때문에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결국 그 허풍쟁이의 속임수에 넘어간 꼴이 되었겠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느끼며 읽었다. 다른 일이 있어 책을 덮을 때마다 다음 부분도 결국 고생스러운 얘기겠지 싶은데도 그게 어떤 고생인지 궁금해서 시간만 나면 책을 펼쳐 들었다. .. 2022. 6. 25.
이서수 소설 「몸과 여자들」 이서수 소설 「몸과 여자들」 《현대문학》 2022년 3월호 저의 몸과 저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실로 부끄러운 고백이어서 저는 다 한 번밖에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가만히 들어주세요. * 저는 1983년생입니다. 그런 탓에 이 사회가 여성의 몸에 얼마나 냉혹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지요. 물론 1959년생인 저의 어머니보다야 훨씬 나은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작금의 젊은 여성들을 볼 때마다 부조리한 억압과 불평등에 짓눌려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는 평생에 걸쳐 마른 몸으로 살았지만, 저의 몸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 역시 몸 때문에 트라우마랄까, 피해의식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고 .. 2022. 6. 14.
위수정 단편소설 「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단편소설 「우리에게 없는 밤」 《현대문학》 2022년 2월호 안나가 본명이에요? 당연히 아니겠지. 남자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워 지수를 보았다. 지수는 감았던 눈을 떴다. 특징 없는 베이지색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아래도 내리자 숫자에 불이 켜진 디지털 벽시계가 보였다. 숫자 사이의 파란 콜론이 깜빡깜빡 말을 걸었다. 시간이 가고 있다고. 남자의 손이 지수의 어깨에 닿았다. 지수는 몸을 일으켰다. 저 이제 학교 가야 해서. 욕실로 향하며 지수는 그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따분한 소설이 있고 처음에 눈길을 끌어놓고는 곧 힘이 빠지거나 주체를 못 하고 마는 소설도 있고 차라리 철학을 읽겠다 싶게 하는 소설도 있고... 이 소설처럼 처.. 2022. 6. 12.
오구니 시로 지음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오구니 시로 지음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김윤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9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주문을 틀리다니, 이상한 레스토랑이네'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저희 홀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모두 치매를 앓고 있는 분들입니다. 가끔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어떤 메뉴든 이곳에서밖에 맛볼 수 없는 특별하고 맛있는 요리들로만 준비했습니다. '이것도 맛있어 보이네 뭐, 어때' 그런 당신의 한마디가 들리기를. 그리고 그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바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지원, 면밀한 준비와 단단한 각오로 이 요리점을 이틀간, 그리고 다시 사흘간 연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요리점은 성공을 거두었습.. 2022.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