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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이야기594

얀 마델(소설) 《파이 이야기》 얀 마델(소설) 《파이 이야기》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2015 49쇄(2004) 이 책이 재미있더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건 오래전이었고 알라딘 강남점에서 중고본을 구입해 놓았는데 '내가 차지할 수 있는 파이(pie)는 어느 정도인지 속상해하는 얘기일까?' 추정해 보면서 또 망설이다가 지난겨울 팔을 다쳐 숨 쉬고 먹고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 '마침내' 읽었는데, 아이고~ 이런 바보! 읽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나! 이렇게 재미있는 책은 드물지 싶다. 나는 언제 또 이만큼 재미있는 책을 만나게 될까. 인도 소년 피신 몰리토 파텔의 애칭이 '파이'(그러니까 애플파이라고 할 때의 그 pie가 아니라 pi)다. 호기심 충만하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나는 힌두교도다. 붉은 쿰쿰 가루가 담긴 조각한 .. 2023. 3. 26.
여성의 몸 보기 : 이서수(중편소설) 《몸과 우리들》 이서수 《몸과 우리들》 현대문학 2023년 3월호 ※ 일부 발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상태로 당신과 자는 기분. 잠시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신체 기관들 가운데 제가 이름 붙인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한 채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멋대로 이름 짓기 놀이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요. 저의 입술은 캐러멜입니다. 제 가슴은 솜사탕입니다. 저의 질은 와플입니다. 어떻습니까. 디저트로 이름 붙인 신체 기관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상당히 퇴행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먹다니요. 신체 기관은 먹고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다시 이름을 붙여봅시다. 저의 입술은 지평.. 2023. 3. 21.
소설 《어머니의 연인》에 등장한 음악들 「모차르트 교향곡 G단조」(7) 「돈 조반니」(8) 「천지창조」(8) 죄르지 리게티 (8) 콘라트 베크 (8) 브루노 발터 (9) 오토 클렘퍼러 (9) 브람스 (10) 베토벤 (10) 브루크너 (10) 리하르트 바그너 (1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0) 제수알도 (11) 드뷔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2)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13) 「라 토스카」(15) 카루소 「여자의 마음」(23)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24) 벨러 버르토크 「조곡 4번」(29)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피콜로와 현을 위한 협주곡」(29) (지방 작곡가) 「프랑수아 리샤르의 그대 앞에 흐르는 시내 주제에 의한 다섯 개 변주곡」(29) 크레네크 (37) 부조니 (37) 스트라빈스키 「제2조곡」(37) 「랩소디 인 블루」(.. 2023. 3. 19.
리베카 솔닛(에세이)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김현우 옮김, 반비 2022(2016) 부모가 알츠하이머 혹은 치매에 걸렸을 때 함께, 그러니까 24시간 함께 생활해보지 않았으면 그 질환 혹은 환자에 대해, 환자와 함께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주제넘다. 이건 확실하다. 나는 그렇게 주장한다. 또 그 환자를 마음 깊이 사랑했다는 건 입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게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도 의심스럽다고 단정한다. 이 책은 그런 어머니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리베카 솔닛의 어머니는 평생 딸을 못마땅해하고, 시기하고, 불평했다. 리베카는 그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죽은 후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2023. 3. 18.
로런스 블록 엮음(단편소설) 《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엮음 《빛 혹은 그림자》(단편소설집) 이진 옮김, 문학동네 2017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 중 딱 한 편만 지루했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가 소개된 글을 읽었다.(《현대문학》2023년 1월호, 394~403 문소영 '에드워드 호포의 고독한 도시 그림에서 소설가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냈을까') 호퍼 그림의 텅 빈 건축 공간과 거기에 빛이 만든 도형과 상념에 잠긴 인물들은 한데 어울려 복합적인 관념과 정서,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창출해낸다. 그에 대해 평론가 롤프 G. 레너는 이렇게 말했다. "얼핏 리얼리즘에 충실한 듯한 호퍼의 회화는 (......)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복제하는 대신 빈 공간을 창조한다. 호퍼 작품의 심연은 서술 텍스트가 갑자기.. 2023. 3. 16.
히라노 게이치로 《본심》 히라노 게이치로 平野啓一郞 《본심》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23년 2월호 "어머님의 VF(virtual figure)를 제작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VF에 관해서는 대략 알고 계십니까?" "아마도 일반적인 상식 정도밖에는......" "가상공간 안에 인간을 만드는 것이에요. 모델이 있는 경우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인 경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시카와 시쿠야 씨의 경우에는 모델이 있는 쪽을 의뢰해 주셨네요. 겉모습은 실제 사람과 전혀 구별이 안 될 정도예요. 이를테면 저의 VF와 저 자신이 가상공간에서 이시카와 씨를 만나더라도 어느 쪽이 실물인지 분명 구별을 못 하실 거예요." "그렇게까지 똑같아요?" "이따가 보여드리겠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믿어주셔도 좋습니다. 말을 건네면 아주 자연스.. 2023. 3. 13.
우르스 비트머(소설) 《어머니의 연인》 우르스 비트머 《어머니의 연인》 이노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9 오늘 내 어머니의 연인이 죽었다. 그는 고령이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아주 건강했다. 그는 입식 보면대 위로 몸을 굽히면서 「모차르트 교향곡 G단조」의 악보를 넘기다가 쓰러졌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손에는 찢긴 악보 조각이 들려 있었다. 느린 악장이 시작되는 부분의 호른 연주부였다. 언젠가 그는 내 어머니에게 이 「교향곡 G단조」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말했었다.─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듯이 느는 언제나 악보를 읽곤 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정열에 관한, 고집스러운 정열에 관한 이야기. 그 앞에 바치는 레퀴엠. 힘겹게 살아갔던 어느 인생 앞에 바치는 절'(157)이다. 어떤 여인이.. 2023. 3. 10.
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 : 마명보살 《불소행찬》 馬鳴菩薩造 北涼天竺三藏曇無讖 역 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 《佛所行讚》 정왜 우리말 역, 도서출판 도반 19 - 13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업의 원인과 결과는 부지런히 되풀이하여 세상의 업을 짓나니 이 세간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오직 업만이 착한 벗이 됩니다. 여러 친척들이나 또 더불이 그 몸을 깊이 사랑하고 서로 그리워해도 목숨을 마치고 정신이 홀로 갈 적에는 오직 업만이 착실한 벗이 되어 따릅니다. 22 - 10 부처님께서는 업의 과보를 잘 아시어 물음을 따라서 모두 말씀하여 주시고 앞서서 바이살리로 가시어 암마라 숲속에 머무셨다. 저 암마라라는 여인은 부처님께서 그 동산에 이르시자 받들기 위하여 시녀 무리들을 거느리고 조용히 나와 받들어 맞이하였다. 22 - 11 모든 깊은 애정의 근원을 거두어 잡고.. 2023. 3. 7.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Pornografia》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Pornografia》 임미경 옮김, 민음사 2010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 포르노 범죄 이야기다. 지식인 비톨드가 그리 친밀하지는 않은 지인 프레데릭을 데리고 시골 마을 친구 히폴리트를 찾아간다. 비톨드와 프레데릭은 히폴리트의 아름다운 딸 헤니아(16세)가 변호사 알베르트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히폴리트의 마름의 아들 카롤(16세)과 엮이기를 갈망한다. 어린 그들이 아름답게 뒤엉키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 연극을 꾸미기도 한다.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으로 설정되는 상상은 비톨드와 프레드릭의 음흉한 상상력(색정적 성격, 그 관능, 육욕의 열기...)을 자극하고 고조시켜 나간다. 헤니아와 카롤의 비밀스러운 에.. 2023. 3. 5.
안규철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안규철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현대문학 2013 연필, 먹, 펜 그림과 에세이 50여 편을 엮은 책이다. 그림 에세이집? 무심코 보는 사물로써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쉰 가지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렇다고 이제 다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의 세상을 엿보는 것이 좋았다. 월간《현대문학》에 연재된 작품들이다. 이미 본봤는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읽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겠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책' 코너에 놓아둘 것이다. 어린 시절 창가에서 나는 또래들보다 한 해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느라로 부모님은 호적을 고쳐 내 생일을 일곱 달이나 앞당겼다. 늦게 본 자식을 빨리 키워야겠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 덕에 나는 나보다 .. 2023. 3. 1.
아리랑 전문가 : 김병하·김연갑 《정선 아리랑》 김병하·김연갑 《정선 아리랑》 범우사 1996 김병하 씨는 내리 30여 곡을 불렀는데, 산속에 묻혀 사는 설움, 세상을 등진 한, 정선 고을의 아름다움, 어린 남편에 대한 불만, 산골로 시집보낸 부모와 중신애비에 대한 원망, 사는 일의 덧없음, 남녀 사이의 애틋한 사랑, 부정하고도 은밀한 사랑 등 노래의 내용은 다양하기 짝이 없었다.(207) 그는 시계수리 기술과 치과 기술도 가지고 있어서 한때 성남·춘천 등지에서 월급 생활도 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의 몸에 붙어 다니던 정선 아라리는 그를 편안한 월급 생활 속에 놓아두지 않았다. 정선 아리리를 마음껏 부르지 못하는 삶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209) 세상은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라리'의 전문가.. 2023. 2. 26.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솔 1999 진단陳摶(872~989)은 중국 당나라 말에 태어나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 초기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오대십국의 혼란기에 중원 국가들은 대개 십여 년을 주기로 몰락을 거듭하여 사회 혼란과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진단은 이 난세에 벼슬길을 단념하고 신선술을 연마하여 신비로운 경지에 이르렀는데 118세까지 사는 동안 여러 왕조에서 서로 벼슬을 주려 했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후주後周의 세종이 불러 신선술을 묻자 그는 "폐하는 만백성의 주인이니 정치에만 전념하시고 금단술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했고, 송나라 태종 때 재상이 은밀하게 묻자 자신은 그런 것을 잘 알지 못한다고 답하면서 "가령 제가 대낮에 하늘을 오르는 재주가.. 2022.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