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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319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박상순 그의 걸음은 빠르고 내 걸음은 무겁다. 자루 같은 가방 두 개를 멘 그의 걸음은 빠르다. 나는 조금 힘을 내서 그의 걸음을 따라잡는다. 그의 가방 하나를 내 어깨에 걸친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다시 그의 걸음을 쫓아가서 나머지 가방도 내 어깨에 걸쳐놓는다. 내 걸음은 무겁다.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둘러메거나, 등에 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겁다. 매일 무거워져서, 이것 하나 없애고, 저것 하나 없애고 빈 손에, 텅 빈 얼굴로 기억도 덜어내고, 추억도 덜어내고, 슬픈 꾀꼬리도 지우고 웃음 짓던 진달래도 지우고, 외톨이 쇠붙이는 파묻고, 나만의 별똥별, 나만의 새벽별도 버리고, 현재는 톡톡 털어서 햇볕에 말리고, 바삭하게 말리고, 어쩌면 무척 가벼울지도.. 2021. 10. 25.
"정지용 이전과 이후" 평론가 유종호의 글은 재미있습니다. 『현대문학』에는 그의 글이 거의 상시적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어느 옛 시인을 찾아―윤태웅의 『소녀의 노래』」(2019년 7월호)에는 정지용 시인 이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뭘 더 이야기해봤자 그렇겠지요. "마음해본다"는 것은 마음을 동사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지용 동시에 그 사례가 보인다. '유념하다' '작심하다'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해두었다 다음 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별똥」 전문 번역 시편 「물결은 조금도」에 보이는 아름다운 마음의 "부끄럼성"도 정지용의 창의성 있는 말씨로 생각된다. 정지용 시편 「따알리아」에는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 익을 대로 익었구나"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정지용 이전과.. 2021. 9. 12.
「내 친구 밋남흥 - 라오스에서」 내 친구 밋남흥 - 라오스에서 송선미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선미.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밋남흥 하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둘이서 손잡고 걸었다 마주보며 웃으며 함께 걸었다 땀 찬 손 얼른 닦고 손 바꿔 잡으며 우리 둘이 손잡고 함께 걸었다 '"왓쯔 유어 네임?"(?) 이게 뭐지?' 하다가 '이것 봐라?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했고 '나도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했습니다.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이 동시를 봤습니다. '감꽃'이라는 분이 지난 9월 10일, 그 카페 '내가 읽은 동시' 코너에 소개한 걸 이렇게 옮겨왔습니다. -- 감꽃님, 설목님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옮겨놓았으니 당연히 지금도 그렇게 잘 있는지 확인하자 싶어서 다시 갔더니 어?.. 2021. 9. 11.
「검고 붉은 씨앗들」 검고 붉은 씨앗들 황인숙 고요한 낮이었다 "주민 여러분께 쌀국수를 나눠드립니다! 서두르세요, 서두르세요! 이제 5분, 5분 있다가 떠납니다!" 집 아래 찻길에서 짜랑짜랑 울리는 마이크 소리 나는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얼굴로 슬리퍼를 꿰신고 달려 내려갔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른 명 남짓 모여 있었다 가만 보니, 마이크를 든 남자가 번호를 부르면 번호표를 쥔 손을 번쩍 든 사람한테 파란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비누도 주고 플라스틱 통도 줬다 어머나! 내가 눈이 반짝해서 파란 야구 모자 남자한테 번호표를 달라고 하자 그는 나를 잠깐 꼬나보더니 '에라, 인심 쓴다' 하는 얼굴로 번호표와 함께 인삼 씨앗 다섯 알이 든 비닐 봉투를 건넸다 벙싯벙싯 웃고 있는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에 섞.. 2021. 9. 6.
《매달린 낙서》 조은희 동시집 《매달린 낙서》 소야 2021 코스모스 핀 가을 강변을 함께 수놓는 고추잠자리 이야기 같은 건 없다. 책상 앞에 앉아서 그런 장면을 떠올려 노래하던 동시인들이 보면 충격을 받겠구나, 머썩하겠구나 싶었다. 순전히 삶에 관한 '이야기'다. 가짜 엄마 진짜 엄마 농사일로 엄마는 너무 바쁘다 거의 밖에 있다 집에 와도 일만 한다 하루 종일 엄마를 일에게 빼앗겼다 가짜 엄마. 잠자리에 누워야만 다정한 엄마 목소리가 찾아오고 토닥이는 손길이 찾아온다 밤에 비로소 진짜 엄마가 옆에 와 있다. 이 아이가 진짜 '진짜 엄마'만 좋아하겠나? '가짜 엄마'라고 싫어하겠나? 그렇게 일만 하면서 아이를 여럿 낳은 뒤 얼른 저승으로 가버린, 오십 년 전 마지막으로 본 나의 그 '가짜 엄마'가 떠올랐다. 빨간 오토바.. 2021. 8. 29.
황유원 「아르보 패르트 센터」 아르보 패르트 센터 황유원 저희 센터는 탈린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라울라스마, 바다와 소나무 숲 사이의 아름다운 천연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저희 센터를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나, 버스나 자전거 혹은 두 발을 이용해 방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센터 주차장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탈린에서 센터까지 두 발로 걸어오는 방법입니다. 35킬로미터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 건 물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 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 2021. 8. 20.
「특선 다큐멘터리」 특선 다큐멘터리 이소호 나는 전기장판 위에서 낮잠만 자는 수사자 한 마리를 혐오했다. 그깟 수염 좀 많은 게 뭐 대수라고 매 끼니마다 소 돼지를 해 다 먹였다 버는 것 없이 쓸 줄만 알았던 남편은 부른 배를 부여잡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생로병사의 비밀」의 볼륨을 높여가며, 오래오래 사는 법을 강구했다 여보 내일은 가젤 데신 뱀을 잡는 게 좋겠어 그게 그렇게 정력에 좋다더구먼 밤일도 사냥도 못 하는 남편 저 혼자 평화로웠다 한편 오늘도 골방의 토끼 새끼들은 글로버만 주워 먹으며 배고픔에 허덕였다 사계절 내내 양푼에 클로버를 비벼 먹다가 빨개진 눈을 부비며 물었다 엄마 우리에게 행운은 언제 오나요 아버지가 좋은 이파리만 골라 먹어버렸단다 토끼 새끼들은 눈이 더욱더 빨개졌다 풀독에 오른 자식새끼들은 점점 매가.. 2021. 8. 14.
「꽃 지는 날엔」 꽃 지는 날엔 김경미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용서하지 않는다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별빛 보며 세 시간 이상씩 걸어도 부족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20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20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을 보낼수록 점점 더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 2021. 8. 10.
송승언「하나코 이야기」 하나코 이야기 송승언 시로가와마을의 연못에는 하나코라는 비단잉어가 살았습니다. 하나코는 1751년 모월 모일에 태어나 1977년 7월 17일까지 연못 세계에 머물렀습니다. 그 좁은 세상에서 200년을 넘게 살다 간 것이지요. 보통의 잉어들은 스무 해 정도를 살다 간다고 하니, 참 오래도 살았네요. 잉어에게 사회가 있다면 몇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이네요. 사진 속 하나코의 형상은 마치 붉은 비단결 위에 투명한 빛 한 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사진 속에는, 그를 마지막으로 돌보았다는 고시하라 고메이 박사로 생각되는 노인이 쪼그려 앉아 당신 손으로 직접 하나코에게 밥을 먹이고 있습니다. 잉어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탓에 만들어진 동심원은 시간을 잊은 듯 영원히 번집니다. * 하나코의 생애는 .. 2021. 8. 4.
박남원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박남원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2021 거의 다 읽어 「죽림정사」「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갈 테니」 두 편만 남은 걸 보자 가슴이 쿵쿵거리는 느낌이었다. '다 읽었네' '끝나버렸네' '이젠 뭘 해야 하지?' 건성으로 읽는다면 몇 페이지 되지 않아서 잠깐이겠지만 모처럼 혼이 빠져 있었다. 대서사시의 막이 내리는 느낌... 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갈 테니 언젠가 나 죽어 내 영별식永別式장에는 굳이 바쁘신데 오실 일 없으시네. 살아 내내 외로움으로 지내는 동안 언제부턴가 외로움에 터를 잡게 되면서 마음 편히도 그렇게 살게 되었으니 마지막 외로움도 실은 해탈로 가는 한 길목 아닌가. 나 그간 잊고 지내던 이승의 노래 한 소절 목질의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 2021. 7. 13.
이원석 「미인」 미 인 이원석 계속 저어주세요 쉬지 말고 그를 저어주세요 기름이 굳어지지 않도록 국자로 젓느라 땀이 뚝뚝 떨어지네요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벽면을 긁어내듯 저어주세요 이따금 우러나는 걸쭉한 핏물은 체로 건져내야죠 뽀얀 거품 사이로 떠오르는 한 손이 당신 손등을 쓸어주네요 그래도 계속 저어줘야죠 바닥까지 휘젓다 그의 흉곽에 국자가 닿네요 살점이 풀어지도록 그를 짓이겨주세요 그의 입술에 묵은 숨결이 매달리네요 그런 건 부드럽게 건져주세요 그가 깊이 우러나도록 연골까지 하나하나 해어뜨려주세요 그리고 다시 저어주세요 그의 눈물은 건져주세요 그의 번민도 건져주세요 그의 미래도 그의 두려움도 그의 희망과 그의 고요도 건져주세요 분노를 끌어내리는 슬픔은 해어뜨려주세요 맥없이 가라앉는 표정들은 녹여주세요 자맥질하는 마.. 2021. 7. 10.
류병숙 《모퉁이가 펴 주었다》 《모퉁이가 펴 주었다》 류병숙 동시 │ 신문희 그림 청색종이 2021 항구 우리 집 현관은 밤마다 조그만 항구 발 실어 나르는 배 신발들이 잠을 자지요. 통통배 보트 고기잡이 배 아침이면 건너야 할 넓은 바다를 두고.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아이들이 하나 또 하나 결혼해서 떠나갈 땐 허전했습니다. 아내 몰래 신발장 앞에서도 먹먹해했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서 이 시를 읽는 동안 또 그 허전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와서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아이들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밤에는 기적 같은 걸 느꼈습니다. 이 넓은 세상으로 그렇게 나갔다가 어김없이 들어오곤 했거든요. 지금은 그 항구가 허전합니다. 출항도 뜸하고 따라서 귀항도 뜸합니다 허전한 항구......... .. 2021.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