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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306

원옥진 「마음 가다듬기 연습」 원옥진 선생님은 교사 시절에 『아이사랑 http://www.talkwithkids.net/』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사이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마음 가다듬기 연습」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는데 당시 나는 그 시를 그냥 글이라고 했습니다(이 블로그의 2010.5.13일자). 그런데도 원옥진 선생님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내가 '아름다운 여성 교사는 아이들을 이런 마음으로 대하는구나' 생각하고 있고, 그 글에 나의 그 마음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가 뭔지, 뭐가 시인지도 모르네?' 부끄러워하며 여기 그 시를 다시 옮깁니다. 마음 가다듬기 연습 따뜻한 커피 마시기 너 참 괜찮은 녀석이야.. 2022. 9. 22.
백석 「흰밤」 백석 / 흰밤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 그야말로 가을밤, 추석입니다. 온갖 것 괜찮고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듯 오늘도 낮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블로그 운용 체제가 티스토리로 바뀌자 16년째 쌓이던 댓글 답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바람에 그렇게 되었는지 오가며 댓글 답글 다는 일에 시들해졌는데, 그러자 시간이 넉넉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없는 날에도 그 댓글 답글이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때로는 한 편의 글을 쓰기보다 정성을 들여서 댓글을 달고 답글을 썼습니다. 또 힘을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 2022. 9. 9.
이영주「구름 깃털 베개」 구름 깃털 베개 ​ ​ 이 영 주 ​ ​ 부드러운 광기로 가득 차 있어. 깃털 같은 광기. 아버지는 한동안 베개를 만들었는데 하얀 솜이 아버지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에 깃털이 돋았지. 아버지, 인공 구름을 끌고 온 자. 인공 구름으로 가득한 베개를 베고 잠이 든다는 것. 나는 가끔 공중에 떠 있는 관에서 잠들었고 깨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내 머리맡에 흩어진 구름 조각을 세탁기에 돌렸지. 실패한 조각은 표백을 해야 한다. 나는 세탁기 통에서 돌돌돌 깃털이 돌아가는 표백인. 아버지는 듬성듬성한 내 깃털 밑에서 죽음을 연습하지. 지난 일주일 동안 죽었다고 하지. 부드러운 광기가 베개 안에 스며들고, 나는 남은 깃털이 모두 빠졌지. 깃털은 역시 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드러운 소재로 광기를 꾸며야 한다. 나는 .. 2022. 8. 30.
유선혜 「아빠가 빠진 자리」 아빠가 빠진 자리 유선혜 흔들리는 이는 밤사이 빠졌고 아침이 되면 그 이를 뱉어냈다. 세 번 나는 이는 없다는 사실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젖니를 모아두던 상자가 있었다. 밤마다 상자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새 이가 영원하라고 빌었다. 어린것들은 하얄수록 쉽게 변하는 법이다. 이가 모두 자라자 더는 아빠와 함께 잘 수 없었다. 사전에 의하면 충치는 일종의 전염병이다. 내 입으로 처음 세균을 옮긴 사람을 찾아낸 뒤, 온통 책임지라고 하고 싶었다. 이를 닦으면 거품이 흘러나왔고 입을 헹구면 끝도 없이 구역질이 났다. 치과에 가는 날들이 늘었다. 아빠는 돈을 냈으며, 썩어버린 이를 고쳐주었고, 나는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빠를 상자 안의 젖니처럼 그렇게 두 번째 아빠가 생기고 세 번째 아.. 2022. 7. 12.
김보나 「러시아 거리」 러시아 거리 김보나 눈이 내리는 오후, 나는 한 남자와 샤갈의 전시회에 갔다. 젊은 샤갈은 그림 안에서 아내를 안고 마을 위를 비스듬하게 날았다. 평생 사랑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는 샤갈의 해설을 보며, 나는 곁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 "로맨틱해요." 남자는 단조로운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예전에 본 그림이라고 했다. 나는 스무 살이고 그는 교수였다. 우리는 '바니타스의 이해'라는 교양 강의에서 만났다. 죽음을 그린 명화를 탐구하는 시간, 프랑스에서 유학한 그는 파리의 카타콤을 거닌 이야기를 꺼냈다. 도심 아래에 숨겨진 지하 묘지가 있고 그곳의 벽은 해골 600여 구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괴테의 말을 불어로 읊기도 했다. "밭도 나무도 정원도 내게는 그저 하나의 공간이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당신이 .. 2022. 7. 4.
김승일 「현실의 무게」 현실의 무게 김승일 어제는 아내가 교주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부자가 돼서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 뭐를 더 사주고, 자기도 회사를 때려치울 수 있을 거라고. 제 아내는 제게 뭘 해보라고 권유하는 일이 잘 없는 사람입니다. 농담으로도 뭘 해보라고 얘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걸 하면 부자가 될 것 같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떠들고. 간밤에 말한 것을 잊고, 아침에 출근하고 돌아와서 회사를 욕하고. 쉬어도 쉬어지지 않고. 뭘 먹으면 얹히고. 그러다 어제는 교주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되기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보통은 뭘 해보라고 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하는데. 사기꾼은 되기 싫어서 바로 싫다고 했습니다. 함께 사는 고양이가 건강하게 장수하면 좋겠습니다. 회사 때문에 돌아.. 2022. 6. 30.
박두순 시집 《어두운 두더지》 박두순 시집 《어두운 두더지》 시선사 2022 길 -김수환 추기경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힘들고 어려운 길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이라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인터뷰하며 말했다. 평생 걸었지만 그길 도달하지 못했다며 쓸쓸한 표정도 슬쩍 지어보였다. 나는 이 시집의 88편의 시를 한꺼번에 읽었다. 미안했다. "시를 그렇게 읽나? 그렇게 배웠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여기저기 다시 살펴보는 사이 그런 비난이 들려오는 듯했다. 소설이나 수필 같으면 며칠 혹은 몇 달 길어봤자 대개 몇 년 만에 쓰는 것이겠지만, 시는 그렇지 않아서 수십 년간 썼을 걸 생각하면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될 것 같았다. 그 미안함이 몰려와서 '내가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읽었지?' 싶었다. 혁명으로 .. 2022. 6. 27.
박승우「꽃피는 지하철역」 꽃피는 지하철역 박승우(1961~ ) 지하철역 이름이 꽃 이름이면 좋겠어 목련역, 개나리역, 진달래역, 라일락역, 들국화역… 꽃 이름을 붙이면 지하철역이 꽃밭 같을 거야. ‘친구야, 오늘 민들레역에서 만날래?’ 이 한마디로도 친구와 난 꽃밭에서 만나는 기분일 거야.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늘 꽃 이름을 부르겠지 원추리, 백일홍, 바람꽃, 금낭화, 물망초… 자주 부르다 보면 사람들도 꽃이 된 느낌일 거야. ‘이번 정차할 역은 수선화역입니다. 다음 역은 채송화역입니다’ 지하철 방송이 흘러나오면 사람들이 송이송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겠지 사람들한테 꽃향기가 나겠지. 그새 또 8년이 지났네? 2014년 5월 14일(수) 조선일보에서 봤으니까('가슴으로 읽는 동시' 아동문학가 이준관 소개). 오월의 지하철역은 꽃 .. 2022. 6. 18.
박지혜「초록의 검은 비」 초록의 검은 비 박지혜 그가 죽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어 온종일 울었다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보려면 이제부터 다른 문을 찾아야 한다 원을 그린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그를 기다린다 그가 침대에서 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그가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다 그가 행복한 입술로 노래를 부른다 그가 착하게 밥을 먹는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가 달개비꽃을 보고 소년처럼 기뻐한다 그가 걸어간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에게 작은 종을 주었다 불안할 때마다 한 번 두 번 종을 흔들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그가 흔드는 종소리처럼 불안하다 나는 그처럼 한 번 두 번 종을 흔든다 종소리는 굳은 표정처럼 외로.. 2022. 5. 17.
정은숙「멀리 와서 울었네」 멀리 와서 울었네 지하 주차장, 신음 소리 들린다. 방음 장치가 완벽한 차창을 뚫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울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 그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그가 낮게 낮게 시간의 파도 속을 떠다닌다. 눈물이 거센 파도가 되고 멈춰 선 차들은 춤을 추네. 울음소리에 스며들어 점차 나는 없네. 이 차는 이제 옛날의 그 차가 아니라네. 이 차는 속으로 울어버린 것이라네. 나를 싣고서 떠나가 버렸다네. ―정은숙(1962~ )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울어본 적이 있는지. 울려고 가다가 중간에 참던 울음을 쏟아진 적이 있는지. 미처 틀어막지 못한 울음 때문에 두리번거린 적이 있는지. 누구도 오래 머물길 원치 않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의 문을 잠그고 .. 2022. 5. 6.
심보선「어찌할 수 없는 소문」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이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매번 오고야 마는 것이 미래다 미래는 원숭이처럼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 악수를 권한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만 피하고 싶다 (하략) 2014년 7월 13일, 중앙읿보 '시가 있는 아침'에 이렇게 딱 두 연만 소개됐고, 강은교 시인의 감상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소문인가. 존재는 없는가. 자기의 존재성이 가끔 의심되는 날, 이런 시를 읽어보자. 당신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이들, 분명 ‘그들이 말하는 그 사람’이 ‘나’는 아니다. 일터에서 ‘사람사이 터’에서 늘 오해받고 있는 나. 다시 한번 말한다.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고 싶은 날,.. 2022. 5. 3.
강기원「코끼리」 코끼리 강기원 오늘도 그녀는 위층 남자의 소변 소리에 잠을 깬다. 새벽 여섯 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는 오늘도 건재하시다. 누런 오줌줄기가 튀어 이마를 때리는 듯하다. 아니, 그가 뿜어내는 정액을 뒤집어쓴 듯하다. 묘한 모멸감 속에 그녀는 침상에 그대로 누운 채 한 마리 거대한 코끼리를 상상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긴 코를 새벽마다 사납게 휘두르는 코끼리. 어느 날 서커스장의 코끼리가 공연 도중 무대를 가로질러 도망갔다지. 의식 있는 코끼리라며 박수를 보냈었지. 추격 끝에 잡히고 만 코끼리가 위층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러고 보니 쿵쿵 울려오는 발소리마저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느리고 둔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녀는 코끼리 발밑에 깔린 채 숨 쉬고 밥 먹고 잠든 것이다. 알 .. 2022.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