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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316

민구 「걷기 예찬」 걷기 예찬 민구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제중 조절, 심장 기능 강화, 사색, 스트레스 해소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걷기란 갖다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는 만 오천 보 정도 이동해서 한강공원에 나를 유기했다 누군가 목격하기 전에 팔다리를 잘라서 땅에 묻고 나머지는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졌다 머리는 퐁당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다시 붙어 있었고 나는 잔소리에 시달려서 한숨도 못 잤다 걷기란 나를 한 발짝씩 떠밀고 들어가서 죽이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걸을 때도 있었다 나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과 더 가까워지리란 믿음이 있거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걷기를 예찬했다 그런 날에는 밤 산책을 나가서 더 멀리 더 오래 혼자 걸었다.. 2022. 11. 27.
박남원 시인의 산문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박남원 시인의 블로그 《시인의 집》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박 시인은 지난해 여름 시인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제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제 시를 다소 과하게 칭찬해주시면서 제 시집을 소개해 주셨는데 보답글 하나 없이 지내는 것도 무례라는 생각으로 몇 자 적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제 시 “내 안에 머물던 새”를 블로그에 올려주셨지요. 그런데 제 시 밑에 덧글로 적어 주셨던 지금까지 ‘상 받은 것도 없다는 시인’이라는 문구가 그때 이후 언제나 제 머리를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평소에 상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며 살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초등학교 2학년까지 우등상이나 개근상 몇 개 받은 것 빼고 이후로는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집 속에 “나에게 행복.. 2022. 11. 13.
문정희 「얼어붙은 발」 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 2022. 11. 9.
류병숙 「물의 주머니」 물의 주머니 류병숙 개울물은 주머니를 가졌다. 물주름으로 만든 물결 주머니 안에는 달랑, 음표만 넣어 오늘도 여행간다. 가면서 얄랑얄랑 새어나오는 노래 물고기들에게 들꽃들에게 나누어주며 간다 얄랑얄랑 간다. -------------------------------------- *제72회 洛江詩祭 시선집 설목의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이 동시를 봤습니다. '물결 주머니'를 가진 시인, 그 시인의 마음이 보고 싶었습니다. 시인에게나 그 누구에게나 시름이야 왜 없겠습니까만 이 시를 읽는 동안은 괜찮아집니다. 읽은 글 굳이 다시 읽지 않는데 '물의 주머니'는 여전히 즐거워서 '얘기가 어떻게 이어졌지?' 다시 찾아 읽게 됩니다. 들꽃도 저버린 늦가을, 그래도 그 개울물 보러 가고 싶어집니다. 시인에게 이런 .. 2022. 10. 30.
"시(詩)는 낭비입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마차를 모는 미소년으로 가장해서 부귀의 신 플루투스(Plutus)로 가장한 파우스트를 모시고 황제의 의전관을 만납니다. 《파우스트 2》(민음사, 56쪽)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의전관 그 기품은 설명할 수가 없구먼. 하지만 달처럼 둥글고 건강한 얼굴, 두툼한 입술에 꽃 같은 두 뺨이 터반의 장식 밑에서 빛나고 있구려. 주름 많은 옷을 입고도 마냥 편안한 모습이야. 그 단아한 모습을 무어라고 말할까? 통치자로선 잘 알려진 분인가봐. 마차를 모는 소년 바로 이 분이 부귀의 신 플루투스십니다! 이렇게 화려한 차림으로 납신 것은 지엄하신 황제의 간청 때문이지요. 의전관 그렇다면 그대 자신은 무엇 하는 누구인지 말해 보게나! 마차를 모는 소년 저는 낭비입니다. 시(詩)이지요. 자신의 재화를 아.. 2022. 10. 25.
서광일 「웃는 여자」 웃는 여자 서광일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며 몸에 힘을 꽉 준다 스킨 로션이 터지고 매니큐어가 쏟아진다 화장대 거울에 비늘 같은 금이 갔다 팽개친 옷들로 장롱은 뒤범벅이다 하루 종일 웃었다 너무 지쳐 오는 길에 한잔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몇 개 안 되는 문장의 주어는 고객님이다 CCTV 그 속에서 웃고 있을 자신을 상상한다 백화점 1층 화장품 매장 앞에는 쓸데없이 사람들이 많다 문을 잠그고 창을 걸어 닫고 그녀는 욕을 하며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진다 침대 시트에 피가 흥건한 날도 있었다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쟤는 누굴까 어차피 전부 닦고 치워야겠지만 헝클어진 화장지처럼 그녀는 웃었다 울었다 선풍기 목을 부러뜨렸다 휴대폰을 박살냈다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 8.. 2022. 10. 19.
안현미 「와유(臥遊)」 와유(臥遊) /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2012년 11월 2일, 비감어린 그 저녁에 이 시를 옮겨적었는데 나는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정말 한지에 연서를 쓸 수 있겠는가 싶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바스라지는 것일까요? 그날 장석남 시인이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시」에 소개했습니다. 2022. 10. 11.
이가림 「벌집」 벌집 이가림 중학생 상렬이는 컴퓨터게임 속으로 들어가 야구방망이로 홈런을 치거나 공격해 오는 적들을 세상 끝까지 쫓아가 드륵 드르륵 총으로 쏘아 죽이느라 제 방에 갇혀 밥도 안 먹는다 그 녀석의 누나인 선이善伊, 아니 써니Sunny는 자율학습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PC방 즐비한 뒷골목에서 '일진회'의 끄나풀이 되어 돈도 빼앗고,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며 쏘다니다가 새벽 두 시 넘어 들고양이 새끼같이 제 방에 잠입, 살짝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몰래 다시 빠져나간다 인생 최대의 달성 목표가 50kg 미만의 다이어트인 그 애들 엄마는 날마다 파라다이스공원에서 눈만 보이는 얼굴 가리개를 쓰고 파워워킹을 하느라, 새벽 일곱 시부터 헉헉 걷는다 이미 침針을 쏘아버린 웅봉雄蜂 같은 그 애들 아빠는 죽어도 침.. 2022. 10. 7.
심창만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또 구월이 가고 시월이 와서 이러다가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둑을 바라보듯 곧 끝장이 나는 것 아닌가 싶어 그 심란함을 써놓았더니 설목(雪木, 박두순)이 와서 보고 자기는 좋다고 시월도 좋아서 야외에 나가면 휘파람을 불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문득 심창만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곧 시집을 찾아보았더니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시인이 아예 내 이야기를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시인은 허구한 날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해 온 생애를 바치며 시를 써주는 사람이니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데 애쓰긴 어려울 것입니다. 연설문 대필을 직업으로 삼거나 남의 일생 이야기에 분칠을 해서 우아하게 보이도록 하는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도 아니고 읽는 순간 입을 닫고 생각하게 하는 이야.. 2022. 10. 5.
조영수(동시)「잘 도착했니?」 잘 도착했니? 조영수 카메라로 꽃을 찍어온 아빠 컴퓨터 화면에서 꽃의 얼굴을 고르고 있다 벌의 엉덩이에 가린 꽃 벌레를 곁눈질하는 꽃 햇살에 눈이 부셔 찡그린 꽃은 휴지통으로 옮겨진다 고르기를 끝낸 아빠가 휴지통 비우기를 클릭하는 순간 못난이꽃 얼굴들 다 돌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향기를 두고 온 들로 산으로. 잘 도착했니? 선택받지 못한 것에 대한 시인의 눈길이 곱고 고맙습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눈길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잘 도착했니?" - 어디에? - 있던 그곳에? 들에? 산에? 그러다가 문득 저승 생각이 났습니다. 나에게 "잘 도착했니?" 하고 물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서러워지기 시작했고 곧 눈물을 글썽거리게 되었습니다. "잘 도착했니?" 그런 시간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2022. 9. 29.
원옥진 「마음 가다듬기 연습」 원옥진 선생님은 교사 시절에 『아이사랑 http://www.talkwithkids.net/』이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사이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마음 가다듬기 연습」이라는 시가 실려 있었는데 당시 나는 그 시를 그냥 글이라고 했습니다(이 블로그의 2010.5.13일자). 그런데도 원옥진 선생님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내가 '아름다운 여성 교사는 아이들을 이런 마음으로 대하는구나' 생각하고 있고, 그 글에 나의 그 마음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가 뭔지, 뭐가 시인지도 모르네?' 부끄러워하며 여기 그 시를 다시 옮깁니다. 마음 가다듬기 연습 따뜻한 커피 마시기 너 참 괜찮은 녀석이야.. 2022. 9. 22.
백석 「흰밤」 백석 / 흰밤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 그야말로 가을밤, 추석입니다. 온갖 것 괜찮고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듯 오늘도 낮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블로그 운용 체제가 티스토리로 바뀌자 16년째 쌓이던 댓글 답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바람에 그렇게 되었는지 오가며 댓글 답글 다는 일에 시들해졌는데, 그러자 시간이 넉넉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없는 날에도 그 댓글 답글이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때로는 한 편의 글을 쓰기보다 정성을 들여서 댓글을 달고 답글을 썼습니다. 또 힘을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 2022.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