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2021/1114

〈물 위의 다리〉죽음 앞에서 만난 사람 앨리스 먼로 소설 〈물 위의 다리〉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 마흔넷 유부녀 지니가 캄캄한 밤에 웨이터 리키와 함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이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걸 보여 드릴 게요." 그가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지금쯤 겁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전의 정상적인 그녀라면 애당초 이렇게 따라나서지도 않았겠지만. "호저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호저는 아니에요. 호저만큼 흔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1킬로쯤 더 가서였던가, 그가 전조등을 껐다. "별 보여요? 저기, 별이요." 그가 물었다. 그가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이 그저 고요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2021. 11. 28.
명퇴를 하겠다는 K 선생님께 (2021.11. 26) ‘명퇴 사유 예시’가 교육 단상 블로그의 단골 유입 키워드의 자리를 차지하더니 마침내 K 선생님으로부터 명퇴 얘기를 듣게 되었고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더니… 교육 말고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아름다운 교육자인 건 분명하지만 세상일에는 더러 멍청한 면을 보여주는 K 선생님이 명퇴를 해서 무얼 하시겠다는 걸까요? 물어나 봅시다. 놀겠다는 대답이 쉽겠지요? 무얼 하면서요? 골프? 사십여 년을! 그 오랜 세월 누구와 함께? 혹 해외여행인가요? 사십여 년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동남아로 마구 돌아다닐 작정입니까? 골프 치러 나다니고 패키지 해외여행 두루두루 다닌다는 선배 얘기에 혹했습니까? 교사시절보다 더 바쁘고 신난다는 그 말을 믿고 있습니까? 사십여 년 그렇게 하겠다는 삶이 부럽.. 2021. 11. 26.
Leisure / W. H. Davies 2016년 3월 초 어느 날, 콜로라도의 교수 '노루' 님이 이 블로그에 긴 댓글을 썼습니다. 그때 나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잘 쳐다봐주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썼을 것입니다. "선생님~" 아이들이 부르면 어떤 선생님은 웬만해선 그 애를 바라봐 주지도 않고 말할 게 있으면 해 보라는 시늉만 하곤 했습니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난 아이가 "안녕하세요, 선생님~" 해도 어떤 선생님은 코대답도 않고 지나갑니다. 나는 그게 정말 못마땅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봐 주지도 않는 주제에 그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길게 얘기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나는 2010년 2월에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나며 그 학교 교직원 전체의 의자를 모조리 회전의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2021. 11. 24.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뿔 2007 줄거리로 보면 의아하다 싶을 수 있다. 켄 부드르와 조헤너 패리가 결혼하는 데는 둘 사이에 구체적인 미움이나 우정, 구애, 사랑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한심한 사내 부드르.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로 늘 곤란을 겪는다. 아내 마르셀이 죽고 딸 새비서마저 장인 맥컬리 씨에게 맡겨 놓고는 이런저런 구실로 돈을 가져간다. 세월도 실없이 보낸다. 괜히 공군을 뛰쳐나왔고 주제넘게도 동료 문제로 비료 회사를 그만두었고 고용주에게 몸을 낮추지 않다가 보험회사에서도 쫓겨났다. 빌려준 돈 대신 허름하기 짝이 없는 호텔을 차지했는데 이 건물을 식당 겸 술집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장인에게 또 돈을 좀 달라고 하지만 사실은 쓸모가 전혀 없어서 철거하는.. 2021. 11. 22.
「즐거운 일기」 즐거운 일기 최지은 11월에서 11월까지 그림 그리고 12월 마지막 날은 아무래도 슬퍼 그림 그리다 깜박 잠들기로 해요 당신이 꿈에 와 그간 이야기 들려주도록 모른 척 잠에 빠지고 이파리 갉아 먹히듯 점점 꿈이 좁아지고 잠이 달아날 듯 말 듯 꿈이 잊힐 듯 말 듯 당신이 떠나려는 사이에도 11월에서 11월이 가고 또 다른 11월 가도록 깊은 잠 들기로 해요 눈 내리는 밤이면 나쁜 기억이 있어 무서운 꿈을 꿨어요 그런 밤에도 눈을 기뻐하는 나의 늙은 개를 위해 채소를 삶고 저녁을 짓고 지친 마음은 그림 속에 주저앉히고 무엇이든 넘치지 않도록 얌전히 걸으며 그렇다 해도 12월의 끝 혼자, 식은 저녁을 다시 데우면서 잠시 창밖은 보겠지요 그때에도 가슴에 내리는 눈은 빈 접시 위에 헛것의 노래 되어 맴돌겠지만 .. 2021. 11. 19.
감옥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저는 이 명상 수련회를 지난 구일 동안 지도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거의 꺼낼 뻔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다시 똥 무더기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여러분은 바깥으로 나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사람을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는 나오지만 다시 기어들어 갑니다. 여기에는 재가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이 수련회가 끝나면 출가해서 스님이 될까요? 아마도 똥 무더기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 갈 것입니다. 그곳이 근사하고 따뜻하며 아늑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벌레가 보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어렵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옥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세상을 알려하지 않습니다. 의지는 감.. 2021. 11. 18.
주례민 《그린썸 Green Thumb》 주례민 글·사진 《그린썸 Green Thumb》 위고 2014 막상 센트럴파크에 들어가면 옴스테드의 직감적 설계를 이해하기 위해 창조자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려는 분석적이고 탐구적인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연의 위엄 앞에서 자신이 한낱 작은 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자연스럽게 공원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 오히려 편안하다. (...)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느낌이다. 산책로, 조깅로, 자전거 도로, 승마 도로 등 기능이 다른 여러 길이 얽혀 있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244) 사람의 발길을 붙잡는 정원,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정원을 만드는 데 꽃만 한 것이 없다. 내가 만들고 싶은 정원은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식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 2021. 11. 16.
나이든 사람들은 불쌍한가?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라는 책에서 세 토막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둘째 세째 토막만 옮겨쓰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의미 파악에 지장이 있어서 첫째 토막까지 옮겨놓았는데 첫째 토막은 그 의미가 어렴풋해서 둘째 토막의 맥락이 연결되는 것만으로 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 2021. 11. 14.
아잔 브람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아잔 브람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 불광출판사 2020 어떤 사람들은 결점을 찾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점을 찾는 마음을 계발해왔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저의 말이나 행동에서도 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부처님에게서도 결점을 찾아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부처님에게서도 결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누구에게서나 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점을 찾는 것은 세상을 잘못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점을 찾는 마음 대신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계발하십시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79~80) 저는 수행에 장애가 일어나면 멧따, 자애로움을 이용합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어떤 장애가 일어나든 그것에 자.. 2021. 11. 12.
인간세상이 그리운 곳 반겨줄 사람 없는데도 인간세상이 그립습니다. 정겨운 사람과 마치 옛날처럼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런데도 그립습니다. 아파트에 들어앉아서도 그렇습니다. 창밖의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들려오면 더 그렇습니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정겨운 대화일 것 같습니다. 나가면 누군가 만날 수 있을 듯해서 들어앉아 있는 것조차 괜찮다 싶습니다. '적막강산'인 곳도 있습니다. 밤이 되면 이름 모를 무엇이 울고, 밖으로 나서면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뿐입니다. 불빛은 누가 사는지도 알 수 없는 단 한 집뿐입니다. 자다가 일어나 창문을 내다봐도 그 집 보안등뿐입니다. 내일 아침이 되어도 나는 출근하지 않습니다. 출근할 곳이 없습니다. 만날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어도 여기 있어야.. 2021. 11. 10.
크로노타입 - 종달새와 올빼미 아내는 일찍 자는 걸 좋아합니다. 일찍 자는 걸 좋아한다? 그건 아니었는데 나와 결혼해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새벽에 남몰래 일어나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정을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사정은 쓰지 않겠습니다. 단칸방 살림을 오래 했으니까 내가 불을 켜놓고 꼼지락거리거나 부스럭거리거나 들락날락할 때마다 당연히 저 인간도 좀 자면 좋겠구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낮보다는 밤에 정신을 차릴 수 있어서 뭘 좀 읽어봐야 할 것이 있으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냥 뒀다가 밤에 읽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그러자니 아내 보기 미안해서 이렇게 선언해버렸습니다. "당신은 종달새야. 난 올빼미고." 그럼.. 2021. 11. 8.
하루 또 하루...... 어제저녁이 잠시 전이었는데 오늘 또 날이 저물었습니다. 2021.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