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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그리운 그때 그녀의 그 윙크

by 답설재 2023. 2. 16.

2020년 7월 14일의 글을 새로 탑재함.

 

 

 

 

 

'나'는 '잔'과 헤어집니다. '잔'은 헤어지지 말자고 하지만 돈도 없고 어쩔 수도 없습니다. '나'는 일자리를 찾아 다른 도시로 가게 되었습니다(찰스 부코스키 『팩토텀』문학동네, 2017, 181~182).

 

잔은 나를 그레이하운드 버스터미널 바깥에 내려주었다. 그녀는 내가 간신히 짐 가방을 내려놓을 시간만큼만 차를 세웠다가 곧바로 출발해버렸다. 나는 대합실로 들어가 표를 샀다. 그런 다음, 안쪽으로 걸어가 등받이가 딱딱한 긴 의자에 다른 승객들과 함께 앉았다. 우리 모두는 거기에 앉아서 서로를 쳐다보았고, 그러고는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는 껌을 씹었고, 커피를 마셨고, 화장실에 갔고, 소변을 봤고, 잠을 잤다. 우리는 딱딱한 긴 의자에 앉아서 그다지 피우고 싶지 않았던 담배를 피웠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고 서로 보게 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산대와 상품 진열대 위에 놓인 것들을 쳐다보았다. 감자칩, 잡지, 땅콩, 베스트셀러, 껌, 입가심용 음료, 감초 사탕, 장난감 호루라기.

 

버스 승강장, 전철역 대합실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아침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이인데도 서로를 쳐다보고는, 눈길이 마주친 것을 난처해하고, 서로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서로 쳐다보고는 그렇게 서로 보게 된 것을 서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버스 안이나 열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길이 마주치게 되면 그렇게 마주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중대본] 월요일 아침입니다. 대중교통 이용시 ▲ 아프면 타지 않기, ▲ 마스크 착용, ▲ 거리두기, ▲ 대화 자제 등 준수로 안전한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버스나 열차를 타는 것이 조심스러운 나날이 흘러갑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불쾌하고 그러다가 항의를 하고 네가 뭐냐고 덤벼들어서 '대판' 시비가 붙기도 하고 그러면 경찰이 개입해서 그 다툼이 해결되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봤자 사이가 멀어지면 다 그만입니다. 오죽하면 물리적 거리는 멀어지더라도 마음의 거리는 더 가깝게 하자고 주문하겠습니까.

 

이십 년쯤 전, 광화문 청사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흔히 열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아침, 금발의 서양 여성이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옆에서 그 열차를 타고 하루종일 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좀 훔쳐보았는데, 눈길이 마주쳤을 때 고맙게도 그녀가 얼른 윙크를 보내주었습니다.

'헉!'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바람에 나는 쩔쩔 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쁜 여성이 윙크를 보내다니! 내게.'

 

나는 그 금발 여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여성도 내게 윙크까지는 보내주지는 않았으므로 그녀는 '나의 유일한 윙크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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