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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냄새를 분류해서 보관한 거대한 집

by 답설재 2021. 6. 24.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열린책들 1991)에서 이 부분을 찾으려고 또 읽었습니다. 어디 중간쯤에 나오는 이야기인가 생각했는데 다행히 62쪽쯤에 나왔습니다.

아예 여기에 필사해 놓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에는 깬 상태로, 그 후에는 꿈속에서 자신의 기억에 보관된 거대한 냄새의 폐허 속을 뒤지고 다녔다. 그는 수백만 가지의 냄새를 검사해서 체계적인 질서에 따라 배열했다.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 섬세한 냄새와 조잡한 냄새, 악취와 향기를 따로따로 분류했다. 그다음 일주일 동안 그의 분류는 점점 더 자세해져서 냄새의 목록은 더 풍부하게 세분화되었고 그 체계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제 곧 처음에 계획한 대로 냄새의 건물을 짓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집과 담, 계단과 탑, 지하실과 방, 감추어진 비밀의 방..... 그 건물은 날마다 더 커졌고 아름답고 완벽해졌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냄새로 만든 내면의 성채였다.

 

이 엄청난 냄새의 건물은 살인자, '냄새의 천재', '냄새 세계의 혁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은 그르누이의 머릿속에 지어진 것입니다.

위의 문장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렇게 훌륭한 일의 시작이 살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는 그 일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마레 거리의 그 처녀의 모습, 얼굴과 몸뚱어리를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가장 좋은 것, 즉 냄새의 법칙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냄새의 집을 짓는 일의 시작이 살인이었다는 얘기는 기가 막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소설이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소설이니까 드러내 놓고 그렇게 꼼꼼하게 그림 그리듯 묘사해놓을 수가 있겠지요.

 

그는 거기서 멈춰 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냄새를 맡았다. 드디어 그 냄새를 찾아내었다. 아주 분명하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끈처럼 그 냄새는 세느 거리를 따라 불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전혀 혼동할 염려 없는 아주 분명하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냄새였다. 그르누이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뛰는 것은 뛰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추적해 온 냄새를 이렇게 분명히 마주하고 있는 데서 오는 흥분 때문이었다. 이 냄새를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이 냄새는 아주 신선했다. 그러나 레몬이나 유자의 신선함과는 다른 것이었다. 몰약이나 계피나무 잎, 박하향이나 자작나무, 장뇌나 솔잎의 향과도 달랐으며 5월에 내리는 비나 차가운 바람, 혹은 샘물 등 그 어느 것하고도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향기는 따뜻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감귤이나 실측백나무, 사향의 그것과도 달랐으며 제스민이나 수선화, 모과나무나 붓꽃의 그것과도 다른 것이었다...... 또 이 향기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그냥 단순히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가볍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하고 지속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얇지만 오색영롱하게 반짝이는 비단 같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또 비단이 아니라 비스킷이 들어 있는 꿀이나 달콤한 우유 냄새와도 비슷했다. 아무리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해도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우유와 비단의 냄새가 섞인 것 같았다. 도대체 파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으며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도 모를 뿐더러 전혀 존재할 수도 없는 그런 향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향기는 당연하다는 듯이 강력한 냄새를 퍼뜨리며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르누이는 그 냄새를 따라갔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자신이 냄새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냄새가 저항도 못할 정도로 자신을 사로잡아 끌어들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

그런데 그르누이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코를 믿지 못하고 지금 맡고 있는 냄새의 정체를 눈으로 파악해야 되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감각의 혼란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실상 다음 순간에 그는 곧 시각적으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후에는 점점 더 자신의 후각에 의지해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녀가 사람이라는 것을 '냄새로 알게 되었다'. 그녀의 겨드랑이에서는 땀 냄새가, 머리카락에서는 기름 냄새가, 그리고 그녀의 성기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났다. 그 냄새를 맡는 일이 즐거웠다. 그녀의 땀 냄새는 바다 바람처럼 상쾌했고, 머리카락의 기름기는 꽃다발의 향기 같았으며, 그 피부에서는 살구꽃 냄새가 퍼져 나왔다...... 그 모든 냄새들이 어울려 향수와 같은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풍요롭고 균형을 이루고 있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그르누이가 지금까지 향수에서 맡아 본 모든 냄새와 그 자신이 상상 속에서 장난으로 만들어 본 냄새의 건축물들이 갑자기 아무 의미도 없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향기는 좀 더 고차원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것들을 배열해야 하는 순수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르누이는 이 향기를 소유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르누이는 생김새부터 (내가 기억하기로는) '두꺼비 같이' 생긴 인간입니다. 그 괴물 그르누이는 그 처녀게게 다가가 목을 졸라 죽이고 그 냄새만 가져옵니다. 냄새를 가져오다니? 냄새를 기억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소설을 읽은 이후, 나는 생각날 때마다 살인자 그르누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수백 만 가지의 냄새를 기억하는 것일까?'

'머릿속을 어떻게 조직해서 그 엄청난 냄새 창고, 냄새의 집(도서관? 박물관? 전시관?)을 지을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