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코이 잉어

by 답설재 2020. 7. 16.

DAUM '코이 잉어' 이미지(부분) 2020.7.17. 아침 현재.

 

 

작가들은 품위 있게 이야기할 줄 안다. 그러니까 작가겠지?

 

박선우의 단편 「밤의 물고기들」에는 코이 잉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코이 잉어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에 맞춰 성장하는 물고기"인데, 가정용 어항에서는 5센티미터, 큰 수족관에서는 30센티미터까지, 강에 풀어놓으면 1미터가 훌쩍 넘게 커진다. 사는 곳의 면적이 코이 잉어의 체적을 결정하는 것이다.

온기나 낙관, 선善과 선의에 대한 상상력은 코이 잉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고, 작다고 생각하면 겨우 머물지만, 어디에나 있고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드시 존재하며 하염없이 부피와 무게를 늘린다. 박선우의 소설 덕분에 나는 코이 잉어의 크기를 조금 더 키울 수 있게 되었다.

 

편혜영의 에세이 「내가 기대하는 작가 박선우|지극한 마음」(『현대문학』 2020년 1월호, 197~199)의 끝부분에서 옮겼다.

같은 주제의 얘기가 또 있다. 다음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상력 사전』의 「벼룩의 자기 제한」이다(열린 책들 2011, 108).

 

벼룩 몇 마리를 빈 어항에 넣는다. 어항의 운두는 벼룩들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다.

그다음에는 어항의 아가리를 막기 위해서 유리판을 올려놓는다.

벼룩들은 톡톡 튀어 올라 유리판에 부딪친다. 그러다가 자꾸 부딪쳐서 아프니까 유리판 바로 밑까지만 올라가도록 도약을 조절한다. 한 시간쯤 지나면 단 한 마리의 벼룩도 유리판에 부딪치지 않는다. 모두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하는 높이까지만 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유리판을 치워도 벼룩들은 마치 어항이 여전히 막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제한된 높이로 튀어 오른다.

 

신기한 현상이다.

나는 코이 잉어보다 벼룩 이야기를 먼저 알게 되었고 그건 신문에 연재된 카툰「광수생각」에서였다(조선일보 1998.3.30). 『상상력 사전』에 실린 이 벼룩 얘기를 보여주고 그 아래에 이렇게 적고 있었다. "당신은 공부라는 유리컵 안에 아이를 가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얘기를 할 수 있는데도 '공부' 얘기를 해준 만화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주 길고 어려운 강의를 딱 한 마디로 누구나 들을 수 있게 해준 것 같았다.

 

나는 그 카툰을 본 순간 교사가 학습주제를 설정하고 아이들의 생각과 활동을 그 주제로 끌고가는 것조차 그만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교육'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 거의 모든 활동이 해당된다는 것을 내가 나서서 설명하고 싶었다. 그냥 아이들에게 다 맡기고 교사는 그 아이들을 도와주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내가 카툰 하나를 보고 그렇게 느낀 것은 평소에 그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각하면 편혜영 작가의 저 말 "온기나 낙관, 선善과 선의에 대한 상상력은 코이 잉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고, 작다고 생각하면 겨우 머물지만, 어디에나 있고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드시 존재하며 하염없이 부피와 무게를 늘린다"는 말도 결국 교육을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박선우의 소설 덕분에 나는 코이 잉어의 크기를 조금 더 키울 수 있게 되었다"는 말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