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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육사 「청포도」

by 답설재 2015. 7. 30.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고옵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서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안동 '지례예술촌' 김원길 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아름다운 몽상, 육사의 "청포도"」에서).

 

(…) 육사의 '청포도'가 '광야'와 함께 노래로 불리게 된 것은 1968년 5월 5일 안동의 낙동강 가에 육사의 시 '광야'가 시비로 세워지고 그날 저녁에 추모 공연을 시내 대안극장에서 할 때였다. 나는 그 무렵 고향 안동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문학 지망생들과 “안동문학회”를 조직하여 문학 활동도 하고 있었는데 4월 중순경에 안동시장이 나를 불러선 5월 초에 육사 시비 제막 기념행사를 하게 되니 안동문학회가 맡아서 무보수로 행사를 치러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행사 전반을 기획하게 된 나는 친구 작곡가 이춘길(1942~2013)에게 이 두 시에 곡을 부쳐서 무대에 올리자고 했던 것이다.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나와서 안동에서 음악교사를 하며 안동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던 이춘길의 작곡과 지휘는 너무나 훌륭하였고 시내 여러 교회의 성가대원들 중 엄선한 단원들로 맹연습을 시켜서 합창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

 

김 시인에게 "청포도" 악보라도 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안동에 있었던 나는, 솔로 부분을 맡은 김복진 형을 따라 더러 합창단 연습장에 가보았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순간 50년 전의 그 연습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김복진 형은 나를 데리고 다니고 싶어했습니다.

 

그 시절도 그렇고 낙동강변 육사 시비도 그렇고…… 나를 참 아껴주던 '중앙약국' 김복진 형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분은 풍채도 좋고 노래도 잘했지만 우스개도 잘했고 '여자를 꼬시려면 뭐 어떻고' 하며 아는 체했고, 007 제임스 본드의 팬이었고…… 마음씨까지 넉넉했습니다. 그래서였겠지만 부인도 마음씨 비단결 같은 미인이었습니다. 딱 보는 순간 '어디서 저런 선녀를 데려왔나!'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말없이 아껴주던 나는, 나의 삶은 좁았습니다. 그곳을 떠난 지 몇 년 후 다시 찾아갔을 때 형은 '안동금성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때 안부를 물어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더 찾지 못한 채 무수한 세월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