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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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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해지고 있는가

by 답설재 2011. 10. 3.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으며 남녀 간의 심리를 어떻게 이처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연애를 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심리적 변화를 기록해 두는 데 심혈을 기울였는가?' '그렇게 해서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가?' 심지어 그런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의 기술』을 읽고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싶었습니다. 번역이 이상해서였을까요? 그 얘기를 이 블로그의 어디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방한 기사를 봤습니다. 「우린 모두 미친 존재…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섰으면」(조선일보, 2011.9.28.A23, 어수웅 기자 jan10@chosun.com).

도입 글과 인터뷰 한 대목을 옮깁니다. 거기에서 핵심이 보였습니다.

 

 

 

 

 

 

 

'일상의 철학자'로 불리는 스위스 출신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41)이 처음 한국을 찾았다. 거창한 정치·사회·경제적 이념이 아니라 가족·친구·연인 등 일상의 관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를 문학·건축·철학·여행 등의 인문적 교양으로 담아낸 보통의 글쓰기는 전 세계 독자,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은 한국 독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1993년 출간된 첫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시작으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여행의 기술' '불안' '행복의 건축' 등 10종의 국내 누적 판매 부수만 100만부를 훌쩍 넘는다. 27일 오후 서울 가회동의 조선일보 한옥 복합문화공간 다사헌(多士軒)에서 이 일상의 철학자를 만났다.

 

―케임브리지 대학, 런던대 박사과정으로 이어지던 철학 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23세에 전업 작가가 됐다. 어떤가.

"가끔 어릴 때 꿈이었던 철학 교수를 생각한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 교수 친구 여럿은 지금 불행하다.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이상적인 대학은 현재 영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과 정부는 교수에게 원하지 않는 논문을 쓰게 하고, 재미없는 과정을 가르치도록 강요한다. 각자 지닌 관심을 연구할 시간은 많지 않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인가?'를 연구하는 철학 교수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야 할 것 아닙니까?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조리를 제일 잘 해야 한다'는 말처럼 참 고약한 질문이긴 하지만……

그 철학자들이 지금 불행하답니다. 보통이 알고 있는 철학자들은 그렇답니다.

보통이 이야기하는 그 철학자들을 살펴보지 않아도 그 지적에 공감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세상입니다.

 

어떻게 된 건지 과학자들이 아주 편리한 핸드폰을 자꾸 발명해 내는데도 저는 그 전화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해마다 좋은 의학기술, 좋은 약품을 개발해 내는데도 질병은 점점 더 고약해지고, 무서워집니다. 하다못해 감기, 독감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스니 조류독감이니…… 그것들은 돈이 있다 해도 예방주사조차 아무나 맞을 수 없었지 않습니까? 이처럼 잘난 세상에서, 이처럼 똑똑하다는 세상에서……

 

무언가 건드릴수록, 사람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설수록, 노력할수록,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무언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까칠한 성격, 까칠한 태도로 따지고 들수록,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아, 극히 일부라는 단서를 붙여야 하겠군요), (단서를 붙였으니까 마음놓고) 그런 놈들일수록 부모 형제에게 아주 고약하게 하고, 친구 친지에게는 더 고약하게 하고, 안하무인으로 설쳐대고, 위아래도 없고……

그러다보니까 세상은 날이 갈수록, 세월이 갈수록 살아가기가 힘들어져서 우리를 허덕이게 하는 것 아닌가 싶어집니다.

 

 

 

 

'착시현상' 같은 겁니까?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라는 책을 보면, 고속도로에서 내가 선택한 주행선이 유독 느린 것 같은 현상은, 다른 선으로 바꾸어 주행해 봐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이 선택한 주행선은 늘 그렇게 느껴지는 착각일 뿐이라고 하던데, 우리가 행복한가 아닌가 하는 이 문제도 다 그런 착시, 착각일 뿐일까요?

 

교육이, 세상을,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육은 아이들이 내일,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행복해지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로 오늘,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활동이어야 합니다. "이걸 알면 나중에 행복해진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전혀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이걸 알면 얼마나 행복하겠니?" 그렇게 말씀하시고, 무언가 알게 된 아이들이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학교, 그런 교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중에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건 속임수고 사기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 받아서 행복한 사람 봤습니까? 더구나 "나중에 행복해진다!"(?) 아이들은 그런 걸 믿으려 하지도 않고, 사실은 믿을 수도 없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지금 이 핸드폰, 이 돈으로 행복한가, 아니면 이 핸드폰, 이 돈 때문에 나중에 행복해지는가 하는 문제와 똑 같습니다.

알랭 드 보통에게 물어보십시오. 제 말이 거짓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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