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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햇살에 관한 기억

by 답설재 2009. 12. 4.

2019. 3. 22(소사동에서는 2016년 3월 하순까지 살았지?)

 

 

부천 소사동 아파트는 동남향이어서 아침나절의 거실에 오랫동안 햇살이 비치지는 않았습니다. 주말 오전의 그 시간에 신문을 읽고 앉아 있으면 온갖 정서가 밀려와 그렇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햇살이 집안에 비치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행복한 시간에……’ 매번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햇살이 스러져가면 주말이 다 간 것 같은 서운함이 밀려왔습니다.

 

이곳 평내동 아파트는 남서향이어서 오전의 그 시간이 역시 짧은 편입니다. 그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시인이라면, 그 짧은 시간에 시 한 편을 얼른 다 지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늦은 밤 맞은편 아파트에서 건너오는 불빛이나 보안등 불빛을 달빛이라고 착각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 달빛 속에서 잠들게 되므로 늦었지만 조금은 더 착한 사람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내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더 친절하게 대해줄 수 있을 것 같아집니다.

 

태어나서 자란 상주의 그 시골집은, 지금은 없어져버렸지만 아침나절은 물론이고 저녁 무렵의 석양까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햇살이 대낮보다 환하게 방안에 비치면 상상이 나래를 펴게 되고 마음이 밝고 따뜻해졌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이와 같은 정서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발견했습니다.1몇 번을 거듭 읽어봐도 참 좋고, 그래서 '이 부분을 한 편의 시詩라고 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는 저녁식사 전에 레오니 아주머니에게 올라가서 문안할 수 있도록 언제나 산책에서 일찍 돌아오곤 했다. 하루가 일찍 저무는 계절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생 테스프리 가에 도착할 때면 우리 집 창유리에는 아직 석양빛이 반사되어 남아 있고 칼베르숲 저 안쪽에 자줏빛 띠 하나가 걸려서 더 먼 곳의 늪에 비쳐 보였는데, 많은 경우 아주 매서운 냉기가 서린 그 붉은빛 다음에는 통닭을 굽고 있는 화덕불의 붉은빛이 이어지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화덕 불빛은 산책에서 얻은 시적인 기쁨에 뒤이어 맛있는 음식과 따스함과 휴식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2)

   여름철에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무렵에도 해는 아직 지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레오니 아주머니의 방에 올라가서 문안드리는 동안, 서서히 기울어 창문에 와 닿은 햇빛은 커다란 커튼과 그것을 묶는 끈 사이에 와서 멈춘 채, 구획되고 잘게 갈라지고 걸러져서 레몬나무로 짠 서랍장 표면에 자잘한 금박의 조각을 박아 넣으면서 숲속의 나무 그늘 밑으로 스며들 때처럼 은은하게 방 안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드문 경우지만, 어떤 날에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와 보면 서랍장에 한동안 새겨져 있었을 금박의 노을빛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고, 그런 때는 우리가 생 테스프리 가에 도착할 때 창유리에 반사되어 걸쳐 있던 석양빛은 자취도 없었으며 숲 저 아래 늪은 그 붉은빛을 다 잃어버리고 때로는 벌써 유백색을 띠고 있었고, 넓게 퍼지면서 수면의 무수한 주름들을 따라 갈라지는 한줄기 긴 달빛만이 늪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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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김화영 옮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의 집쪽으로-제1부 콩브레』(『현대문학』2009년 10월호, 해외문학 연재 제10회, 252~253쪽).

 

2) “은유”와 “빛의 반사”가 그 메커니즘을 교환하면서 서로의 은유로 작용하는 프루스트 특유의 수사법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다. 장 피에르 리샤르의 표현처럼 여기서 “은유와 반사는 서로의 능력을 한데 합하여, 주제의 반사에서 비교로, 비교에서 연상으로, 혹은 대립으로 의미와 욕망의 완벽한 바통터치 라인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단순 반사(창유리에 비친 석양빛) 혹은 복합 반사(햇빛이 나무에 비치고 그 나무가 연못에 비친다)는 다시 은유적 전이轉移라는 제2의 유희(‘하늘의 붉은 노을/화덕 불빛’ 같은 ‘유사성’이나 ‘하늘의 싸늘한 냉기/화덕불의 따뜻함’ ‘시적 감흥/식욕’ ‘산책/휴식’ 같은 ‘대립’에 의한)를 통해 더욱 복잡해지면서 풍경과 산책자를 따뜻하고 영양분이 가득하며 보상의 대가가 돌아오는 어떤 내면성의 기대했던 목표로 인도한다. 바통터치와 우회를 거듭하는 동안 모든 것이 하나의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항상 간접적인 방식으로, 조화롭게 조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옮긴이 주).